타인의 삶

 

 ‘타인의 삶’ 이라는 제목의 제 인생 최고의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독일 통일 전 동독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아직 안 본 분들도 많을테니 더 이상 자세한 영화 얘기는 하지 않을께요. (조언을 드리자면 처음 30분간의 지루함을 꼭 견뎌내도록 하세요. 여러분 생에 가장 멋진 영화 중 한편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영화 타인의 삶>

 

하지만 이번에 제가 “타인의 삶” 이라는 제목으로 쓰는 이 글은 이 영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서핑과 물질주의’라는 제목을 정했다가 물질주의라는 단어가 조금 부적절한 것 같아서 여러차례 고민 후에 제목을 ‘타인의 삶’ 으로 바꾸었습니다

자, 그럼 서핑 이야기 카테고리에 왜 난데없이 타인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는지…제 친구의 이야기로 한번 시작해보겠습니다.

 

며칠 전 친구가 차를 하나 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GMC의 Sierra라는 럭셔리 픽업트럭을 구매했더군요.(저는 개인적으로 차에 대해 잘 모르지만 GMC 차량이 비싸다는건 알고 있습니다.)

 <GMC Sierra>

 

처음엔 많이 놀랐습니다. 

평소에 제가 알던 그 친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차를 구매했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그 친구 주머니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는데 차에 그렇게 큰 돈을 쓸 정도로 여유가 있는 그런 친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한번 물어봤죠.

좀 작고 저렴하고 성능 좋은 차도 많은데 너랑 안 어울리게 왜 무리해서 이런 차를 샀냐구요.(이제 막 새차 뽑은 사람이 듣기에는 조금 화날만한 질문인가요?;;)

그 친구 대답이 제 예상대로입니다.

‘자기 학교(회사)에 가면 다른 동료들이 다 좋고 큰 차를 타는데 자기만 작은 차를 탈 수가 없었다더군요.’

 

 

보여주기용으로 그냥 적당한 차를 사려고했는데 고르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눈이 높아져 이 차를 사게되었답니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차를 살 때 이런 목적으로 구매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처음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별 생각 없이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 날에서야 문득 제 주위에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사고나서 매달 말 카드빚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

‘여행을 하면서 SNS에 자랑할 사진 올리느라 정작 같이 여행다니는 친구에게는 소홀한 친구’

‘잘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 신발/가방/옷을 입고다니면서 밥은 푸드코드에서 먹는 친구’

 

이렇게 제 주위에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너무나 그런 사람들이 많은 나머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 자체가 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질정도로요.

물론 가끔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이 자극제가 되어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가 있기는 합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더 멋진 서핑 영상과 더 멋진 서핑 사진을 보여드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채칙질을 하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남에게 자랑하는 것을 자기자신을 위한 만족보다 우선시하는 경우예요. 사실 주변에 둘러보면 정말 많지요. 바로 이번에 차를 산 제 친구도 이 경우구요.  

“타인의 시선”을 너무 신경써버린 나머지 자신의 삶에서 “자기자신”을 2순위로 만들어버리는 실수를 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다보면 언제나 자기 스스로의 만족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자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나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자기 자신은 언제나 뒷전이고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 먼저 생각하는데 말이죠.

 

문득 중고등학교 시절의 제 자신이 생각났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던 제 모습이요. 다만 열심히 공부하던게 저 스스로의 흥미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닌 부모님을 만족시켜드리고 남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대학을 가기 위해였습니다. 

공부라는 것 자체를 통해 얻는 만족감이나 기쁨 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매일매일이 답답함의 연속이였고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공부를 끝내고 대학생이 되고 싶은 생각 뿐이였습니다.(정작 대학생 때야 말로 정말 제대로 공부를 시작할 때인데 말이죠.)

이렇게 스스로의 만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무언가를 하게 되면 그 만족감의 수명은 너무나 짧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을 때 부모님이 주시던 초콜렛, 사탕 하나가 주는 그런 만족감이죠.

초콜렛, 사탕이 금새 녹아버리듯 남을 위해 사는 삶의 만족감은 금새 녹아 없어져버립니다.

이 짧은 순간의 만족감이 사라지고 나서는 기나긴 후회의 시간이 이어집니다. 수십, 수백, 수천만원을 쓴다한들 그 결정에서 자기 자신이 1순위가 아니였다만 언젠가는 분명 후회의 순간이 옵니다. 투자한 시간과 돈, 노력에 비례해 그 후회의 고통은 크고 시간은 길어집니다.

 

사실 저도 이런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타인의 삶”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다가 2009년 호주로 여행을 다니며 서핑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제까지의 내 삶은 진정한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삶”이였다는 것을요.

 


<2009년 호주 티트리베이>

 

타인이 바라는 제 모습이 아닌 제가 바라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가는데 서핑이 정말 큰 도움을 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하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파도에 부딪히고 파도를 타는 그 순간에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버리고 스스로의 만족감에 완전히 취해버리니까요. 그 순간 정말 모든 것이 나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뭘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쓸 겨를조차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이제까지 생각하던 서핑과 서퍼의 모습이였습니다.

 

그런데 최근들어 주위 분들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는 한국의 서핑 분위기는 이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분위기냐구요?

서핑 외 대부분의 다른 스포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비빨”을 추구하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그 장비빨이 제대로 활용만 된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구매한 장비들이 모두 다 제대로 활용되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장비빨이라고 할 수 없죠. 비록 서핑 보드가 1,000장이 있더라도 말이죠.

정말 큰 문제는 

“남들이 다 이 브랜드 사니까 나도…”
“남들은 다 이거 쓰니까 나는 좀 더 비싸고 멋진거를…”
“싼거는 모양이 안 나니까 좀 무리해서라도 비싸고 멋진거를…”
“서핑은 못하니까 장비라도 좋은 걸…”

등등의 이유로 서핑장비들을 마치 경쟁하듯이 구매하는 병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에 제가 몇 마디 드리자면…

남들보다 2배 더 비싼 보드가 절대 여러분의 라이딩을 2배 더 멋있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더 튀는 디자인의 보드, 웻수트나 독특한 모양의 핀이 여러분의 라이딩을 더 멋지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더 멋진 라이딩을 만들어주는 건 ‘엄청나게 비싼 장비들에 적당히 즐기는 서핑’이 아니라 ‘적당한 장비에 끝 없는 연습과 좌절, 고민 그리고 분석을 통한 서핑’ 입니다.”

 

연습을 많이 하고 싶지만 그럴 시간과 파도가 없다구요? 핑계예요.

파도가 없을 때는 서핑 영상을 보거나 스케이트 보드를 타면서 연습을 할 수도 있고 파도가 있을 때는 언제나 스스로를 촬영하고 이것을 시간 날 때마다 분석하는 것 자체가 연습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서핑을 잘할지보다는 어떤 장비가 더 멋질지 지금도 웹서핑을 하면서 장비빨 세울 고민을 하고 있다면…그 시간과 돈 그리고 노력으로 위에 제가 말해본 것들을 해보시는 건 어떤지요? 

서핑이 잘 안되서 답답한 마음에 그냥 정말 정말 돈을 어딘가에 쓰고 싶으시다구요? 그렇다면 이제 곧 다가올 겨울 서핑을 위해서 좀 더 좋은 웻수트에 투자를 하세요.

 
<2011년 겨울, 양양 기사문>

 

겨울이 오면 정말 크고 제대로된 파도를 탈 날이 많아집니다. 추워서 타기가 힘들 뿐이죠. 그 때를 대비해 장비빨 세울 돈을 아껴서 정말 좋은 웻수트 한벌을 마련하세요.

좋은 겨울용 웻수트도 이미 구매했는데 정말정말 돈이 많아서 어딘가에 쓰고 싶다면 쓸대없는 장비빨 세우기보다는 같은 웻수트를 2벌, 3벌 더 구매하세요. 추운 겨울에는 젖은 웻수트가 아닌 바싹 마른 웻수트를 입는 게 의외로 서핑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겨울에는 추워서 서핑을 안하실거라구요? 그렇다면 (제주도를 제외한) 한국에서는 제대로된 파도의 맛을 볼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휴가 때마다 해외에 나가서 서핑을 즐기시지 않는 이상 10년이 지나도 서핑 실력은 별 차이가 없을거예요. 평생 모자란 서핑 실력을 커버(?)하기 위해 멋지고 비싼 장비빨을 세우셔야겠네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좋은 장비를 써도 서핑을 잘 못하면 별로 멋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꼴볼견이죠. 차라리 적당한 장비에 적당히 타는 분들이 더 멋집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서퍼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트렌드에 당당히 No를 외치며 스스로가 필요한 것을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이 글을 읽으면서 “아, 앞으로 빌라봉, 립컬, 록시 뭐 이런 서핑 브랜드 물건은 절대 사면 안 되겠다.” 라고 생각하셨다면 이 글의 의도를 완전히 잘못 받아들이신겁니다.

이 글의 의도는 서핑장비/의류를 제작/보급하는 서핑 브랜드 업체를 배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당연히 사야되는 거고 이들 서핑 용품 업체는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쉽고 빠르고 저렴하게 제공해주는 고마운 역할을 해줍니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쩌면 20~40만원이면 구매할 수 있는 기성 웻수트 대신 맞춤 서핑 수트를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가며 수백만원을 지출해서 만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글의 의도가 뭐냐구요?

 

“서퍼라면 뭘 갖고 있고, 뭘 입고 있고, 뭘 타고 있으면 더 멋질까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하면 조금이라도 더 멋지게 라이딩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됩니다”

 

 

저는 한국에서 서핑이 단순한 트렌드로서 반짝 생겨났다가 없어지길 바라지 않습니다. 가까운 호주나 일본처럼 서핑이 건전한 취미, 스포츠로서 제대로 자리잡고 하나의 문화로서 발전하는 게 바로 제가 바라는 한국 서핑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광적인 장비 경쟁 트렌드는 이런 건전한 서핑문화를 만드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핑을 이제 막 배워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위화감만을 조성할 뿐이지요.

 

이제까지 다른 사람이 바라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삶을 살아 왔나요?
이런 삶의 자세는 여러분이 서핑에 더욱 더 흠뻑 빠지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타인이 만들어준 여러분의 삶은 이제 그만 버리세요. 무엇을 하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보다는 자기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더 초점을 맞추어보세요.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러분의 삶을 낭비하지 마세요. 제가 그랬듯 서핑이 여러분을 도와줄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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